본문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마저 쾌락과 소망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버려짐이 합리적인 존재 방식이 되는 권력의 메커니즘.

무명 모델인 아키는 유명한 사진작가와 작품을 하고 호평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녀는 다음 작업을 위해 찾아간 전시회에서 어떤 남자가 자신을 모델로 제작된 전신 조각상을 손으로 더듬고 있는 것을 보고 마치 남자의 손이 실제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간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아키는 피로한 몸을 풀어줄 안마사를 부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안마사는 마사지를 시작하고, 아키는 계속 강하게 누르라고 지시한다. 안마사는 아키의 몸을 손으로 훑는다. 곧 아키는 안마사가 전시회에서 본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돌아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아키를 기절시키고 공범자인 엄마와 자신의 작업실로 끌고 간다. 작업실 중앙에는 고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여자의 몸이 누워 있고 벽에는 눈, 코, 입, 귀, 배꼽, 가슴, 팔, 다리가 부분별로 모여 기괴한 형태로 장식되어 있다.
남자―미치오는 자신이 조금 조각을 하고 있다며, 그녀를 모델로 한다면 자신이 바라던 시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니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아키는 격렬하게 거절하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미치오는 아키를 모델로 조각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키는 탈출하기 위해 여자 경험이 없는 미치오를 유혹하여 어르고 달래며 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아키를 탈출시키려 하지만 미치오에게 저지당하고 만다. 결국 엄마는 아키를 죽이려 하고, 그것을 말리던 미치오는 엄마를 밀쳐 죽게 만들고 만다. 아키는 미치오를 여자 경험도 없는 아이의 불과하다고 조롱한다. 미치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려 하지 않았으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 죄를 떠넘기고, 조롱을 부정하기 위해 억지로 아키와 관계를 맺는다. 엄마의 시신은 집 마루 아래 묻힌다. 며칠 동안 작업실에서 강간당하던 아키는 어느새 미치오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고 어둠 속에서 그와 같은 장님이 되어가며 촉각이 예민하게 발달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촉각의 쾌락을 탐하며 갈수록 더 강한 쾌락을 원하게 되고 더 강한 촉각의 쾌락을 위해 결국 서로의 몸을 이빨로 깨물고, 밧줄로 묶고, 때리고, 칼로 찌르기에 이른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만, 그 공포 속에서도 극상의 쾌락을 느끼며 죽음에 이르기 위해 아키는 미치오에게 자신의 사지를 절단해 주기를 요구한다. 미치오는 칼과 망치로 아키의 사지를 절단한다. 아키의 사지가 절단될 때마다 미치오가 아키를 모델로 만든 조각상의 사지가 떨어진다. 그리고 미치오는 칼끝을 자신을 향하게 한 후 아키의 몸 위로 쓰러져 죽는다. 그들의 몸은 겹치고 화면은 끝까지 아키의 안광을 비추며 어두워져 간다.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눈먼 짐승 The Blind Beast>은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69년 작품이다.
영화는 대부분 한정되고 갇힌 공간에서 진행되며, 단 세명의 인물만이 등장한다. 단순하지만, 그 내부에 흐르는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바깥으로 표출된다. 오히려 이 단순함은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연출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촉각의 쾌락을 추구하다 파멸하는 이 영화가 욕망과 쾌락,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많은 영화 중에서도 기괴하기 이를 데가 없다.
영화 속에서는 시체절단, 근친상간,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모티브로 돌아다니며, 억압되어있기도 하고 하염없이 분출되기도 한다. 영화 속 대부분의 배경이 되는 미치오의 작업실에 설치된 독창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조각과 설치물은 아마 긴 시간 기억될 것 같다. 욕망과 쾌락, 그 근본이 되는 육체를 영화는 끝없이 몰아붙이고 가학 하여 경계를 허문다.
<눈 먼 짐승>은 에로티시즘과 때어 놓을 수 없는 권위주의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나는 영화가 욕망과 쾌락, 사랑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이 적나라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런 풍경이 우리 마음에 분명 존재하고 있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어 때때로 눈을 피해야만 했다.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체제와 규범, 수단적 가치에만 의존하는 근 현대인의 의식 풍경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권력에 대한 한 편의 심리학이다. 이 영화 속에 한 명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 안에 머물고 그로 인해 파멸하는 개인이다. 나는 이 영화를 인물들 위주로, 그들이 서로를 수단화하고 대상화한다는 전제를 놓고 글을 이어 나가보려고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항상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누군가에게 의존한다. 그들은 그럼으로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키는 예술가에게 의존하고, 미치오는 조각과 모성에 의존하며, 엄마는 아들에게 의존 혹은 지배한다. 그들은 각자를 그 자신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없는 자를 투영하며 의존하고 지배한다. 아키에게 미치오는 사진작가의 대체 자고, 엄마에게 미치오는 죽은 남편의 대체 자며, 미치오에게 조각과 엄마는 맹인이라는 자신의 신체조건 탓에 포기해야 했던 여자들의 대체 자이다 (그래서 아키가 등장하자 엄마는 위치를 위협받고 아키를 제거하려 한다. 엄마가 엄마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미치오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미치오는 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를 대상화하여 바라본다. 그들은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고 쾌락적으로 의존하기에 이른다. 타인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다른 이를 바라보고, 대상화된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이 의존하거나 지배하는 타인이 없다면 존재한다는 감각을 가질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셋 중 하나만 사라져도 그들은 톱니바퀴 하나가 사라진 기계처럼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미치오는 엄마를 잃고 자신의 역할을 잃었다. 이제 그는 아키에게 의존하기 시작한다. 아키는 엄마가 사라지자 탈출에 대한 의욕을 잃고 미치오에게 의존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사실 사디즘이 지배하고 마조히즘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존적인 관계다. 영화 초중반 미치오는 완벽하게 우위에서 아키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요구하고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지만, 종반에 가서는 아키가 미치오에게 명령하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치오는 기계나 맹목적인 하인처럼 어떤 요구도 거절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하는 권력 속에서 그 영향으로서만 존재를 느낀다. 인물들은 "자기의 정신적 행위의 자발성을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행위는 어떤 특수한 상황 아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의 영향으로 부터 유래하고 있다."
그들은 꼬리를 문 뱀처럼 자기 자신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그들은 각자가 각자를 대상화하며 의존하고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렇게 되어버린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마저 대상화하여 이용해야 할 수단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을 잃은 그들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쾌락에 의존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자신보다 쾌락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는다. 마치 개인이 전체를 위해 존재할 뿐인 전체주의처럼 그들은 자신과 삶과 죽음마저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어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유와 개인성으로부터 도피한다. 그 과정에서 위계와 권력은 선택의 책임을 대신 져주고 죄책감을 덜어주며 나약함을 강인함으로 둔갑시키며 쾌락만을 극대화 시키고 모습을 감춰간다. 우위에 있는 것은 하위의 가치를 끝까지 소비하여 자신을 드높이고자 한다. 그들은 스스로에게서 기꺼이 폐쇄되어 존재하지 않음으로만 향한다. 그들은 결국 죽음 이르러 모든 것을 끝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죽음마저도 그들에게는 쾌락의 수단에 불과하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가치를 증명 받으며 삶아감은 그 자체로는 잘못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명백히 의존성을 띄며 개인성을 밑바탕에 두지 않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다. 자신을 무엇 무엇을 위한 존재라고 규정화 시켜나가다 결국 그 무엇 무엇이 사라지는 순간 존재는 의미를 잃고 나 자신을 규정화시켜줄 대상을 찾아 스스로를 내버린다. 그렇게 존재는 지극히 대상화되고 수단화 되어 파멸에 이른다.
영화가 무엇보다 거북한 지점은 기괴한 미장센이나 파격적인 성적 연출이 아니라, 자기 운명,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갖는 일에서 도피하고자하는 소망이 개개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공포이며, 내 안에 있는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삶과 죽음 자기 자신마저 수단으로 활용해 내버리는 인간을 그저 보여준다. 이곳엔 선과 악도 의지도 선택도 없다. 그저 무엇으로부터 도피하는지도 모르는 맹목적인 인간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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