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영화

존 카펜터 <괴물 The Thing>

Jun 0_0 2022. 8. 15. 01:51

(스포일러 리뷰)

 

괴물 1982

The Thing, 존 카펜터

 

 

 

 

 

  존 카펜터 감독의 <괴물 The Thing>은 고립된 미국 남극 기지에 우연히 찾아온 인간의 몸을 빼앗고 형체를 완전히 복사하는 외계 생물체와의 사투를 그린 호러 영화다.

  이 영화가 단순히 호러 영화가 아닌 고전으로써 많은 sf, 호러, 공포 영화에 영감을 주고 많은 감독이 찬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영화가 된 것은, 인간의 모습을 복사하는 외계 생물체의 특성을 통해 기지 안에 인물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며 결국 파멸에 이르는 모습을―40년 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공포감 있게 연출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개봉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더 씽>이 관객들에게 공포감을 안겨주기 위해 사용한 연출과 플롯은 여전히 많은 여전히 많은 영화에서 공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고립된 공동체에 퍼지는 의심과 공포를 이보다 긴장감 있게 연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괴물>의 공포는 단순히 외면적인―기괴한 괴물의 모습이나 점프 스케어 같은 놀람에 가까운―공포가 아니라 우리가 본능적으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미지와 외로움, 어둠과 같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공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공포가 타자와 관련이 있다고 느꼈고 그 점을 집중적으로 이 영화가 어떻게 내게 공포감을 안겨주었는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영화의 공포는 괴물의 특성으로 인해 한순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자가 되어버린 동료들 즉, 그들과 내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들이 나의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그로 인해 무너진 신뢰가 공포감을 안긴다. 누가 괴물인지 알 수 없고, 만일 내 옆에 있는 타인이 괴물이라면 나도 곧 그처럼 나의 존재는 소멸되고―다른 이들처럼―괴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미지의 존재로 인한 두려움을 조금씩 나와 보다 가깝게 (괴물의 정체를 밝혀내는 방법이라던가, 그들이 인간을 복사하는 방법 같은 그사이에 드러난 정보도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파편적인 정보들은 더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왜냐하면 근원적인 공포는 괴물이 아니라 결코 그것이 퍼트린 미지라는 현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근접시켜감으로서 공포감을 고조시킨다.

  만일 동료가 정말 괴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료는 진짜 괴물보다 더한 거부감과 두려움만 느끼게 할 뿐이다. 나를 제외한 이들이 한순간에 알 수 없는 타자가 되어 괴물이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평소에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며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해할 수 없음이란 곧 공포다. 다만 그 한순간의 공포보단 익숙함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괴물은 단지 그 익숙함을 영화적으로 파괴하는 도구일 뿐이다.)

  동시에 영화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자는 당연하게도 곧 나의 죽음으로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데 그 죽음은 단순한 죽음은 아니다. 내가 죽어도 나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한 무언가가 살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나의 육체적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것은 신체 강탈로 인해 내가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어 버릴 수 있다는 공포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 이곳에서 나를 대체하고 나의 자리―사회적인 위치―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이기도 하다. 누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상하 관계는 순식간에 뒤바뀌고 무너진다. 영화 속에서 타자는 나를 죽게 만들지 모르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나의 신체를 강탈하고 나의 자리―권력―를 빼앗으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강도에게서 나를 지키는 방법은 나 이외에 모든 타인을 배척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리고 절대 괴물이 아닌 나 자신조차 타인에게는 괴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공포를 심는다.

  <괴물>의 공포는 이렇게 끊임없이 나와 타자 사이를 오가며 다층적으로 증폭되어간다.  

  그들은 알게 됨으로써 두려워한다. <괴물>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가장 큰 요소는 우리가 괴물의 특성 즉, 인간으로 변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곁에 있는 사람이 괴물인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괴물의 존재와 특성을 알고 있기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만일 나를 위협하는 누군가가 괴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는 내겐 타자라는 괴물이 된다.  괴물은 그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을 모두를 집어삼킨다.

  그들의 의심과 두려움은 무지보다는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됨에서 온다. 그들은 동료 중 누가 괴물인지 몰라서 두려워했지만, 그전에 괴물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것이 두려운 것이고, 또한 내가 타자들을 괴물일지 몰라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 또한 나를 그렇게 볼 것이라는 알게 된 것이 그들을 더욱 두렵게 만든다. 공포는 무지를 깨닫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신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결코 신을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알고 있기에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공포에 떤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알게 되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여 숨었다.)

  고립된 기지에 인간들은 또다시 철저히 개인으로 고립되고 만다. 그리고 영화는 그 모든 상황을 관객 또한 기지 안에 있는―누가 괴물인지 아닌지 유추하는―한 명의 참가자로서 그리고 동시에―누가 괴물인지 알고 있어도―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개인이자 방관자로서 참여시킨다. 그 무력감이 내겐 이 영화가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나 이외에 무엇도 믿을 수 없고, 끊임없이 폐쇄로 향한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나 이외에 다른 이가 미지의 타자라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나 외에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미지의 타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타인은 지옥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도 타인인 나도 지옥이다.

  결국 이 영화의 끝은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다. 이 영화를 시작하게 한 것은 괴물이지만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영화의 진행을 이끌어 가는 것은―서로에게 철저히 타자가 되어 진실을 밝힐 수 없게 만든―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개의 모습으로 기지에 찾아온 괴물은 인간이 되었고, 그러자 인간들은 괴물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인간이 괴물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은 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아주 작은 계기만 있으면 될 뿐이다.

 

PS.

   또한 영화는 지구로 날아드는 비행선이 보이는 우주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언제 지구로 찾아온 것인지는 모른다. 아마 인류가 탄생하기 전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천수만 년을 지나 현대 사회가 되어 그것을 타고 온 괴물은 깨어나고 인간의 탈을 쓰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타자가 된다. 나는 타자라는 우주―그것, 괴물이 우주에서 온 존재라는 것을 상징으로 도입한다면―결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코즈믹 호러이기도 하다.

 

PPS.

  사실 나는 아직도 과연 누가 처음에 괴물이 되었는가를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스펜서는 괴물이 되었는가 아닌가에 대한 토론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진실은 없는 것이고 (이것은 이 영화의 위대함은 단적으로 드러내는 점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연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누가 괴물이 되었고 누가 괴물이 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사실 내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공포를 없애려는 것인데, 내가 감독이라면 감독이 관객들이 그것을 하게 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감독이 스펜서에게는 보이지 않는 입김을 통해 괴물이 누구인지 말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화는 끝까지 누가 괴물이었고, 괴물이 아니었는지 진실로 밝히지 않을 것 같다. 끝없이 질문을 만들어내는 모호한 상황만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영화를 빛나게 만드는 장치는 없기 때문이다.